태국, 방콕 - 2013. 12. 28
라오스에서부터 동행한 형은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로 가기를 원했다. 한국 사람들을 만나 여행 이야기도 하고 왁자지껄하게 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 한국인 숙소를 선호하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미묘한 감정의 벽만 넘어가면 그렇게 정이 많은 사람들도 없었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겸 형을 따라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아침 7시,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게스트하우스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짐을 풀어두고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관리자인듯 했다. 방이 있는지 물어보니, 도미토리 한 자리만 남았다고 했다.
나는 다른 숙소를 이용해도 상관이 없었으니, 형에게 도미토리에 들어가라고 하고 다른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방 상태는 무난한 도미토리였으나, 가격이 300바트로 도미토리 치고는 너무 비쌌다. 처음 방콕에 와서 머문 100바트 짜리 싱글룸과 비교해봤을 때 그 어떤 장점이 없었다.
결국 처음 방콕에 왔을 때 머물렀던 숙소를 찾아가봤으나 아쉽게도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옆 일본인이 운영하는 100바트 도미토리에 짐을 풀었다.
밖에서 보이는 외관은 거의 무너질 것 처럼 보였으나,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90%는 일본인이었고, 10%는 국적불명의 히피들이었다. 방의 복도를 걸어가니 대마 냄새가 진동을 했다.
도미토리 내의 대부분이 자고 있었고, 내가 사용할 침대 윗 칸의 여자만 깨어있었다. 그녀는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했는지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지만, 내가 영어로 대답하자 관심을 꺼버렸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부스럭거리며 짐을 푸니 웃통을 벗은 채 자고 있던 일본 남자애들이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탱탱 부은 얼굴로 나에게 인사했다.
방 안의 투숙객은 내 윗 침대를 쓰는 일본 여자애, 방금 막 일어난 일본 남자애들 3명, 한 명은 어디를 갔는지 아침부터 침대에 없었다.
일본인 3명은 아시아를 함께 여행하고 있는 친구 사이였다. 풍기는 아우라가 거의 2년 정도를 여행한 것 같아서 어디를 여행했을 때 제일 좋았는지 물어보니, 방콕이 여행의 첫 나라, 첫 도시라고 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이제 2주 정도 되었다고 했다.
내 침대 윗 칸을 쓰는 일본 여자애는 이런 마초적인 게스트하우스와는 전혀 어울리는 외모가 아니였다. 정말 예뻤다. 영어를 거의 못해서 아주 간단한 대화만 가능했다. 일본 남자애들 말로는 자기네들보다 더 오래 여기에 머물렀다고 했다. 엄청 깔끔떨고 까탈스러울 것 처럼 생겼는데 이런 후진 게스트하우스에서 잘도 생활하는 것을 보니 의외였다.
게스트하우스는 굉장히 독특했다. 각 층 계단마다 화장실이 있었고 그 앞에 흡연실이 있었는데, 대마를 피는 일본인들이 한가득이었다. 주인도 딱히 말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화장실 샤워 시설은 더 재밌었는데, 호스 하나에서 변기로 들어가는 물과 샤워기로 나오는 물로 갈라져 나왔다. 뭔가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운데 어쨌든 특이했다.
일본 남자 3인방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형을 다시 만나기로 했기에 시간이 되면 밤에 술이나 한잔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원래는 왕궁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방콕 박물관으로 방향을 돌렸다. 개인적으로 박물관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번 방콕 박물관도 기대가 컸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돌멩이 몇 개, 청동검 몇 개 수준이 아니라 볼 것이 아주 많았다. 빠르게 훑어 보듯이 봐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당한 시간을 박물관에서 보냈기에 왕궁은 들르지 않고 바로 카오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나가는 아무 버스나 붙잡고 "카오산?" 하고 물어보니 타라고 했다. 그런데... 뭔가 쎄한 느낌이 들어 돈을 내면서 다시 "카오산?" 하고 물어보니 태국어로 뭐라고 한참을 떠들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눈만 껌뻑이고 있는데 뒷 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카오산 No, No, Out"이라고 소리쳤다. 버스에서 내려 두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서야 겨우 카오산으로 돌아왔다.
카오산로드 뒷 편은 축제가 한창이었다. 저녁도 먹을 겸, 축제도 구경할 겸 거리로 나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맛있는 꼬치들이 종류별로 구비되어있었고,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행위 예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볼 것은 많았지만 할 것이 없는 축제였다.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놓을 무언가가 없었다. 흥에 취해 가던 축제의 시작길은 금방 마지막 상점에 도착했다. 다시 축제 속으로 들어갈까 했으나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그저, 맛있는 꼬치로 저녁식사를 했다는 점, 몇 가지 재밌는 공연을 봤다는 점에 만족했다.
형은 얼마 남지 않은 태국에서의 일정을 좀더 유흥가에서 보내고 싶다며 내일 숙소를 옮길 예정이라 했다. 나는 딱히 관심도 없고, 별로 돈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기에 카오산에서 남은 일정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오늘이 형과 나의 마지막 날이었다. 라오스 전체의 일정을 같이 보냈으니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형이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간단히 맥주를 하기로 했다. 짐을 놓고 온다고 방안으로 갔는데 어떤 남자 한명을 데리고 나왔다. 숙소에서 혼자 있길래 같이 맥주를 한잔 할겸 데리고 나왔다고 하였다.
그와 맥주를 마시면서 행동 하나하나에 어색함이 느껴졌다. 마치, '여행지에서는 이렇게 해야 자유로워 보인다!'라는 책을 읽고 온 사람마냥 행동했다. 하나의 행동을 하면, "여행지에서는 이렇게 해야 멋있지!", "나 오늘 정말 여행을 너무 잘 즐기는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말끝마다 했다.
날라리가 되고 싶은 모범생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우리와 맥주를 조금 더 마시다가 11시에 숙소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일찍 들어가요?" 라고 물어보니, 자기는 항상 11시 반전에 취침을 한다고 했다. 정말 독특한 캐릭터였다.
우리의 마지막 밤을 이대로 보내기는 아쉽기에 근처 펍에서 맥주를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한참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누가 "헤이~"라면서 어깨를 툭 쳤다. 이 머나먼 타국 방콕에서 누군가 싶어 뒤돌아보니 어제 우본랏차타니에서 방콕행 버스표를 살 때 만났던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우리는 밤버스를 이용했고, 그는 낮버스를 이용해서 같이 이동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보니 굉장히 반가웠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는 언제나 나긋나긋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형과 오스트리아인과 함께 오늘 끝장을 보기로 했다. 결국 새벽 3시반까지 술을 먹고 만취 상태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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