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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세계 일주

[세계일주 여행기, 태국] #23 동남아 국제거지를 만나다.

by 곰같은 남자 2021. 7. 4.
태국, 방콕 - 2013. 12. 29

 

눈을 떠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넘어가 있었다. 형에게 연락을 하니 지금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짐을 싸고 있다고 하였다. 머리도 아프고, 다리도 무거웠지만 10일이나 같이 지냈는데 아무런 인사도 없이 보낼 수는 없었다.

형이 지내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찾아가 기다리니, 큰 키의 건장한 남자와 내려왔다. 새로운 동행인 듯하였다. 조금 더 있다가 출발할 것이라고 하여 쉼터에 앉아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쉼터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여행자들이 있었다. 그중에 굉장히 튀는 여행자가 있었는데,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 여행자와 전형적인 히피 모습을 한 50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젊은 여행자는 히피라는 단어 자체를 모를 것 같은, 아주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었고 50 정도 되어 보이는 여행자는 반듯함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를 것 같은, 아주 자유분방하게 생긴 아저씨였다. 상당히 어색한 조합이었다.

출처 : 언스플래쉬

 

청년은 기가 빠진 듯한 모습으로 한쪽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히피 아저씨는 아주 분주했다. 어제 길거리에서 샀다며 자랑하듯이 몇 가지의 장난감, 부족같이 생긴 손수건을 펼쳐놓았다. 한쪽 구석에는 약 2미터 정도 길이의 나팔도 있었다.

아저씨는 자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나팔을 불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었다. 물론, 좋은 소리가 날 턱이 없었다. '뿌우우~' 하며 이상한 소리를 한번 신음하더니 나팔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꽤나 재밌어 보이는 상황에 내가 먼저 그에게 사 오신 것들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이 구입한 장난감과 손수건, 나팔이 경제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재밌다는 생각이 든 히피였다. 한국인 히피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형이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히피 아저씨한테는 형을 데려다주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형은 마지막까지 나에게 다른 지역으로 같이 이동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으나,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미안하지만 카오산로드에 더 있을 생각이라는 말과 함께, 진한 포옹을 했다. 그렇게 형은 떠났다.

출처 : 언스플래쉬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니 그는 여전히 나팔을 들고 끙끙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저녁도 먹고, 물건도 살 겸, 어제 갔었던 페스티벌을 같이 가자고 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그를 따라나섰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늙어 보이는데, 젊어 보였다. 풍기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뭔가가 좀 달랐다. 인생에 엄청난 풍파가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나에게 다음 여행지가 어딘지 물었다. 카트만두로 갈 예정이라 하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안부를 전해 받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안부를 전해줄 사람의 이름도 몰랐기에 성함을 물어보니, 그가 짧게 '동남아 국제거지'라고 이야기하면 알 것이라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정말 이 사람이 거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동남아 국제거지 맨몸 노숙 여행'이라는 책의 저자였으며, 동남아 여행에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여행자인 듯했다.

 

저녁 음식거리를 사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그는 자신이 철학을 이야기했다.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격을 물어보면 그 물건을 사야 한다"라고 했다. 가격을 물어보고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이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적당한 가격이면 흥정 없이 산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나에게는 별로 적용시키고 싶은 철학은 아니었으나, 국제거지라고 소개한 사람 치고는 꽤나 마음에 드는 철학이었다.

 

몇 가지 음식을 사서 사람이 없는 구석에 앉아 음식을 나눠먹었다. 나와 국제거지 말고도 2명의 일행이 더 있었기 때문에 나름 풍성한 식사였다.

다 먹고 정리를 하는데 그가 목이 마르다고 했다. 우리 모두 물통을 안 들고 나와서 물을 사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빨대 하나를 꺼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그가 어디론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는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큰 화분이 있었다. 그러더니 화분 안 고여 있는 물에 빨대를 꽂고 물을 빨아 마셨다.

 

충격! 진짜 충격!이었다. 화분 안의 물은 거의 똥색에 가까웠다. 가격을 물어보면 돈을 지불하라는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돈을 아끼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써야 할 때 안 쓰고, 쓰지 말아야 할 때 쓰는 청개구리 같은 사람이었다.

출처 : 픽사베이, 위의 아테네학당 그림에서 계단에 널부러져있는 철학자가 디오네게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물을 너무 잘 마셔서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고대 위대한 철학자 한 명이 떠올랐다. 알렉산더 대왕이 와도 햇빛 가리니 비키라고 말한, 아고라 광장 한복판에서 자위를 하며 "배고픔도 이처럼 문질러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외쳤던, 디오게네스.

그는 '동남아 국제거지'이자,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페스티벌을 구경하다가 그와는 헤어졌다. 내일 카트만두로 떠나는 아침 비행기가 예약되어있었기 때문에 공항 픽업 버스표를 사고 게스트하우스의 1층 작은 바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일본 남자애들이 웃통을 벗은 채로 담배를 피우면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들의 집에 내가 잠시 쉬고 있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그들이 먼저 맥주를 한잔 하자고 했으나, 내일 아침에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한 번 꼬셔, 맥주를 한잔 할까 했지만,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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