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안나푸르나 라운딩, 묵티나르(3,800m) - 2014. 1. 9
새벽 3시.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늘은 안나푸르나 라운딩의 최종 공격 포인트인 토롱라를 넘는 날이었다. 어제 약간의 고산증세로 다이아막스 한 알을 먹고 잤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손발이 찌릿찌릿했다. 잠을 깰 겸 밖으로 나가니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방에서는 형들이 미니 버너를 이용해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차를 마시고 출발하려나 생각했는데 큰 배낭에서 물을 부으면 완성되는 군용 비빔밥이 나왔다. 마지막 날이니 힘내서, 그리고 안전하게 다녀오자 이야기했다.
약 4시쯤 장비를 챙겨서 롯지 밖으로 나왔다. 달이라도 떠있으면 좋았으련만 너무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걱정이 앞섰다. 나는 랜턴이 없어서 중간쯤에서 앞사람이 밟은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맨 뒤에 서면 뒤에서 비춰주는 빛이 없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었고, 앞쪽은 당연히 설 수가 없었다.
한 30여분 걸었을까. 뒤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다. 진짜 깜짝 놀랐다. 이 새벽에 뒤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 또한 한국인이었는데 내 나이 또래 친구였다. 어제 토롱패디에서 우리가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그 험한 산을 넘어서 따라왔다고 하였다.
그는 함께 트래킹 하던 일행과 사이가 틀어져 산행 중 무리에서 이탈하였다고 했다. 그러다가 토롱패디에서 하이캠프를 넘어갈 때 고산병에 걸렸는데,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소인지 당나귀인지에 얹혀서 마낭까지 내려왔다고 하였다.
심지어 돈도 없어서 가방에 있던 옷들과 차고 있던 시계까지 팔았다고 했다. 고산병이 오면 단순히 머리가 띵한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병인 것 같았다. 그는 우리 산행의 마지막 일행이 되어 토롱라를 넘기 전 총 6명의 그룹이 만들어졌다.
뽀드득. 뽀드득. 녹지 않은 눈과 얼음 빙판으로 길이 위험했다. 그러다가 빙판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미끄러져버렸다. 다행히 가방이 무거웠기에 옆길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뒤에 서 있던 형도 순간적으로 땅에 스틱을 꽂아주어 내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새벽 길이 어두웠기에 바로 옆이 천 길 낭떠러지인지, 안전한지는 모르겠으나 순식간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길이 좁아서 빙판을 피하자니 낭떠러지 옆으로 걸어야 했고, 낭떠러지 길을 피하자니 빙판길을 걸어야만 했다. 한발, 한발 아주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빙판 구역이 끝나니 가파른 산길이 나왔다. 진짜 지옥의 초입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헐떡거리고, 정면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내 얼굴을 베어갈 듯 아팠다. 발도 너무 시렸다. 결국 불편하더라도 양말을 한 켤레 더 신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어 가방에서 양말을 꺼내 신었다.
새벽 5시 반. 어느덧 내 뒤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산들은 조금씩 햇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갔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마냥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빨리 걸어서 목적지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더 갔을까. 드디어 멀리 룽다가 보였다. 그간 힘들었던 고생들, 두려움들이 모두 사라지며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5,420m. 1,000m가 안 되는 동네 뒷동산만 다니던 내가 5,420m를 간다는 것은 매우 큰 도전이었으나 꾸역꾸역 걸어와 그 앞에 서있었다. 사진, 동영상을 찍으며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데 숨도 차지 않았다. 비석 옆에 조금 더 높은 언덕이 보여 올라가 한참 동안 토롱라 기념 비석을 쳐다보았다.
흥분도 잠시, 이제부터 하산을 시작해야 했다. 1시간 여쯤 갔을까. 발가락의 느낌이 이상했다. 신발안으로 돌멩이가 들어간 것처럼 걸리적거려 신발을 벗고 확인해보니 오른쪽 발 가운데 발가락이 찢어져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양말 두 겹 중 하나를 벗으니 피범벅이었다.
걸리적거리는 발가락도 문제였지만, 내리막길을 계속해서 내려가다 보니 무릎까지 아파왔다. 중간중간 무릎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내려왔다.
토롱라부터 묵티나르까지는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새벽 이른 시간부터 계속해서 산행을 했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 묵티나르에서 산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느지막한 점심을 먹고, 며칠 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천국에 온 거 같았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 빠질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술이었다. 묵티나르 역시 3,800m 정도로 상당히 높은 곳이었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이미 380m 지역까지 내려온 듯했다. 무탈하게 다친 사람 없이 이곳까지 왔음을 축하하며 럭시 파티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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