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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 생각

[발칙한 여행 철학] #1 당신은 당신만의 개똥철학이 있나요?

by 곰같은 남자 2020. 12. 23.

여행 중 문득문득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하고 기록했습니다. 

다이나믹 세계일주

방방곡곡 세계여행

함께 읽어주시면 더욱 풍성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여행 중, 숙소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널찍한 노트에 뭔가를 집중하여 적고 있는 한국인 여행자 한 명을 만났다. 혼자 맥주를 마시다 심심한 마음에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차가운 맥주를 내밀며 물었다.

"블라디보스톡 여행 계획을 세우시나 봐요?"

그가 대답했다.

"세계일주 계획을 손보고 있어요"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나 역시 5년 전 세계일주를 다녀온 여행자라 소개하니, 그의 눈빛이 변했다.

신기했다. 나였다면 공짜 맥주에 눈빛이 변했을 텐데.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20대 중반의 청년은 블라디보스톡이 세계일주 첫 여행지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해 유럽을 한 바퀴 돌고, 아프리카 이집트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종단하는 약 5~6개월 정도의 여정이었다.

그의 노트를 한두어 장 넘겨보니 내가 아프리카 여행 계획을 짤 때 실수했던 부분이 똑같이 발견되었다. 경험에 비추어 아프리카 관련 여행 정보를 나눠주는 도중, 궁금한 점이 생겼다.

"세계일주는 왜 가시는 거예요?"

"제 평생 꿈이었어요."

나는 예전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듣기 좋았다.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의 나이가 내가 세계일주를 출발할 때의 나이와 비슷하여 더욱 정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행에 대한 비장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미래의 인생 방향 설계', '나를 바꿀 수 있는 계기' 그리고 요즘 많이 듣는 '행복을 찾고 싶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별 말없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왔다.

 

 

이번엔 그가 물었다.

"세계일주를 다녀온 뒤에 어땠어요?"

아까 그에게 건네준 맥주는 이미 다 마셨는지 테이블 위에 살짝 찌그러진 상태로 놓여있었다. 주방으로 돌아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오며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나만의 개똥철학을 얘기하기에는 그의 머릿속이 너무나 단단했다. 굳이 솔직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교과서 같은 대답을 했다.

오랜 시간 대화를 하는 동안, 속 깊은 곳에서 여행에 대한 내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충동이 몇 번이나 일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화가 겉도니 서서히 이야기가 죽어갔다. 그도 뭔가 느낀 듯 실망하는 눈초리였다. 다음날 아침, 그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가 떠올랐다. 약간은 우려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여행 중 자연스럽게 느끼는 '개똥철학'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이미 '여행은 이것이다.', '행복은 이것이다.'라는 답을 내린 채 모든 사물과 사람 속에서 억지스럽게 의미를 찾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고, 바람을 바람으로 느끼지 못하는 그런 여행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메고 다니는 가방보다 더 무거운 짐이 가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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