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포카라 - 2014. 1. 1
포카라행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체크아웃을 하는데 카운터를 보는 직원이 길을 막았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숙박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오늘 새벽에 나가야 했기에 어젯밤 카운터 직원에게 숙박비를 미리 계산했는데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길을 막고 있는 카운터 직원에게 설명을 했으나 전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여유 있게 체크아웃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빨리 버스터미널로 가야 하는데 난감했다. 아침 카운터 직원에게 전날 카운터를 보던 직원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해달라고 했으나, 이미 깊은 잠에 빠졌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버스 시간이 다되었다고 말하니 직원도 난감해했다.
결국 직원은 나를 보내주었다. 카운터 직원은 어젯밤 카운터를 보던 직원과 연결이 되기 전까지 무척이나 초조해하며 하루를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미안함 마음도 들었지만, 나도 아침밥을 먹지 못해 쫄쫄 굶은 상태로 버스를 타게 되었으니 퉁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자 버스라서 그런지 출발시간이 지연되지는 않았다. 포카라까지 가는 길 내내 경치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피곤하기는 했으나 잠을 청하지 않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나와 같이 여행하는 형은 지리 선생님이었는데 산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안나푸르나라는 멋진 산도 오르고, 여행도 하고, 아이들 수업자료도 만들 겸 네팔에 왔다고 했다. 여행 내내 수업자료로 쓰기 위해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도 경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계곡의 생성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역시, 지리 선생님 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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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내내 작은 마을들을 마주했다. 고요하고 정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버스에서 내려 하루 이틀쯤 머물다가 갈까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내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렸더라면 좀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버스가 중간에 정차했다. 화장실 시간이었다. 당연히 화장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도로 한복판에서 알아서 해결을 하면 되었다. 남자들이야 구석에 가서 대충 처리할 수 있지만, 여자는 어떡하나 싶었다. 여자분들은 꾹 참고 그냥 갈 줄 알았는데, 같이 탄 여자들이 천으로 가려주거나 자신이 입고 있던 치마로 대충 가린 후 해결을 했다.
나 역시 소변을 본 후 주변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화물차가 오늘 걸 보지 못했다. 정말 3걸음만 더 걸어갔어도 차에 치여 죽을 뻔했다. 쌔애애앵하고 화물차가 지나가고 나니 다리가 풀리고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관심이 없는 무심한 버스기사는 신나게 경적을 울리며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바라보니 아까 그 아름답던 풍경들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참, 빠르게도 무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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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 지 대략 8시간 만에 포카라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받은 헤리네 게스트하우스와 산촌 다람쥐는 이미 방이 꽉 차있었다. 어쩔 수 없이 건너편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사람당 400루피씩 지불하고 머물기로 했다. 깎으려고 노력했는데 게스트하우스 주인 역시 한 고집해서 합의를 본 게 첫날은 800루피, 둘째 날은 머문다면 600루피에 하기로 했다.
생각 외로 형도 안나푸르나에 대해 거의 모른 채로 네팔에 왔고, 나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몇몇 트래킹 샾과 게스트하우스에 들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결론은 하나였는데, "시간이 많은 사람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보다는 라운딩을 해라!"였다.
나는 15일짜리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선택권이 ABC밖에 없었는데, 형은 정보를 얻을수록 눈빛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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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이라는 한국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할 겸 정보를 더 얻기로 했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 사장님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형은 사장님의 강력한 추천 끝에 결국 ABC에서 라운딩으로 트래킹 코스를 변경했다. 당연히, 나에게도 꼬드김이 들어왔다.
시간적으로 여유는 있었으나, 네팔 비자가 15일짜리라는 문제도 있었고, 빨리 인도 여행을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오늘 밤까지 고민해보고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1월 1일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축제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관람객들도 많았다. 동네 구경을 할 겸 길을 무작정 걷다가 대학교 잠바를 입은 대학생들을 만났다. 우연찮게 인사를 하게 되어 물어보니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ABC등반을 하고 어제 포카라 시내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부러웠다. 등반을 마친 게 부러운 게 아니라, 예쁜 여자 대학생들과 같이 등반한 남자 대학생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세계일주를 떠났으니 나랑 거의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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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그런지 몸이 피곤했다. 형과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먹을 꼬치를 몇 개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형이 배낭 속에서 캠핑장비들을 꺼내고 있었다. "뭐하세요?" 물어보니 산 꼭대기에서 라면 끓여먹을 생각으로 가져왔다는데 테스트를 한번 해보자고 하였다.
장비는 별 탈없이 잘 작동했고, 라면을 잘게 부수어 죽처럼 끓여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신라면 국물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라면을 먹고 있으니, 형이 내 눈앞에 신라면 5 봉지를 들이밀며 말했다.
"라운딩을 하다가 중간에 라면 같이 끓여먹자"
라면 때문은 아니었지만, 결국 나도 ABC트래킹에서 라운딩 트래킹으로 코스를 바꿨다. 네팔까지 온 김에 제대로 산을 타보자는 생각도 들었고, ABC보다 높은 지대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비자도 연장해야 하고 트래킹 장비도 알아봐야 했기 때문에 모레부터 등산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형이 샤워를 하는 동안 테라스로 나오니 저 멀리 산이 보였다.
저런 멋진 산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 궁금하고, 설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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