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바라나시 - 2014. 1. 21 ~ 30
동남아를 여행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패션은 거의 비슷하다. 단순히 내 기억의 오류일 수 있지만, 현지에서 파는 알라딘 바지가 아니라면 등산복이었다. 그러나 서양 여행자들은 조금 더 다양했다. 걔 중에서도 가장 보기 좋았던 것이 청바지였다.
누군가는 겨우... 청바지?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꾸민 듯 꾸미지 않아 보이는, 없어 보이면서도 있어 보이는 듯한 청바지만의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낡고 더러울수록 멋이 배가 되었다. 사실 청바지는 통풍도 좋지 않고 잘 마르지도 않아서 여행 중 가장 비효율적인 옷 세 손가락 안에도 꼽을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네팔과 인도 어디쯤에서부터 인가 계속해서 청바지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팔에서부터 상당히 많은 로컬 시장을 돌아다니며 청바지를 구경했으나 디자인이나 색이 너무 촌스러워서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오늘도 청바지를 구입하기 위해 로컬 시장에 갔지만 역시나 마음에 드는 제품이 없어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에 한 인도인이 다가왔다. 자신의 가게로 와서 청바지를 구경하는 게 어떤지 물었다. 어차피 청바지를 구매할 의향은 확고했으므로 그를 따라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영어를 아예 하지 못했으나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구경하고 싶은 청바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아저씨가 꺼내 주면 색을 보고 사이즈를 물어보는 과정뿐이었다. 다만 인도 시장에서 바지를 사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텐데, 로컬 시장에서 파는 청바지는 모든 사이즈를 구비해놓고 파는 게 아니라, 원하는 디자인과 색이 있더라도 사이즈가 없으면 구매를 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하나의 청바지가 눈에 띄었다. 오래 입으면 히피 느낌을 물신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연청색 청바지였다. 사이즈만 맞으면 구매할 생각이었으므로 가격을 물어보니, 리바이스 정품 제품이라며 1,500루피를 제시했다. 리바이스 정품 청바지도 어이가 없지만, 가격 자체가 얼토당토 하지 않았기에 흥정해서 대폭 깎을 생각을 하며 바지를 입었다.
하지만 사이즈가 너무 커서 허리춤에 주먹이 두 개는 들어가고도 남아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가게 주인에게 미안하지만 너무 커서 구매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그가 벨트를 던져주었다. 하지만 벨트로 해결될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
바지를 벗으며 안 산다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가방을 자신의 테이블 서랍에 넣어버린 것이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어서 가방을 돌려달라고 하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며 가방을 돌려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방을 달라 했으나 그는 바지를 구매해야만 가방을 돌려준다고 이야기했다.
바지가 너무 크지 않냐. 이걸 어떻게 사냐. 네가 보지 않았느냐. 말했더니, 이번에는 한번 바지를 입었으니 800루피를 내라고 했다. 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한참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기도하는 몸동작을 취하더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고는 돈을 보여줬다. 어찌나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지 바로 무슨 말인지 눈치챘다.
'신을 위해 나에게 기부해라'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개 같은 새끼...
폭발해버렸다. 열이 너무 받아서 한국말로 쌍욕을 하면서 가방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완강했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몸싸움을 하기에는 내가 위험하고, 경찰이라도 오는 날에는 골치가 아파질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과감한 한방 승부가 필요했다. 만약, 준비한 한방이 먹히지 않으면 돈을 지불하겠다 하고 가방을 받은 후 청바지를 얼굴에 던져버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1, 2, 3. 속을 숫자를 센 후,
"팡!!!!!" 테이블을 때려 부술 듯이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내 몸속에서 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소리쳤다.
"가방 내놓으라고 이 시X 개X같은 XX야!!!!!!!!!!!!!!!!!"
그도 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나 보다. 깜짝 놀라고는, 그제야 더럽고 치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가방을 서랍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화가 난 표정으로 가방을 주어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머리 뒤통수에 대고 그가 힌디어로 떠들었다. 뻔했다. 욕이겠지. 저주겠지. 나 역시 한국말로 욕을 시원하게 한 바가지 해주고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나와 가게 주인이 얼마나 크게 싸웠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쫄면 안될 것 같아 어깨를 탁 펴고 천천히 걸어 나왔으나, 속으로는 엄청 겁이 났다. 갑자기 여기 모든 사람들이 나를 집단 구타를 하는 것은 아닐까. 주인장이 갑자기 뛰어와서 달려드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릭샤를 잡아탈 때까지 그런 일은 벌어진 지 않았다.
그날 밤. 너무너무 열이 받아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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