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쿠리 - 2013. 2. 8
00시 30분쯤. 너무 추워서 도저히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추운 날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버스 창문을 열어놓고 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이 다 깨서 멍하게 앉아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멈췄다. 그렇지 않아도 소변이 마려웠는데 잘 됐다 싶었다.
인도인 20명 정도가 우르르 내리길래 '다들 소변이 마려웠나 보군...' 생각하며 볼일을 보고 버스에 탑승하려는데, 버스 앞에 자동차 2대가 서있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느낌에는 공사 중인 것처럼 보였다.
버스로 돌아와 '여기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으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점점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움직였는데, 그곳에는 사람이 죽어있었다. 처참한 사고였다. 시체는 보지 못했으나 시뻘간 피가 보여서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동생은 아직 잠이 들어있었다.
위험한 운전습관을 수없이 갖고 있는 인도인들이기 때문에 사고가 안 나는 게 더 신기한 것이었다. 버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다시 버스에 탑승하라고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몇몇 사람만 버스에 탔을 뿐 꽤 많은 사람들이 사고 현장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오지랖이었다.
충격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제든지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벽 4시 무렵 자이살메르에 도착했다.
오늘 낮 버스를 타고 쿠리로 갈 예정이었기에 숙소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나와 동생 외에도 외국인 가족, 외국인 커플이 있었는데 가족은 미리 호텔을 예약해놨는지 릭샤를 타고 바로 버스정류장을 떠났다.
외국인 커플에게 다가가 호텔을 예약했는지 물어보니 당당하게 예약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다행이었다. 이 긴긴밤을 함께 보낼 동지가 생겼다. 그들도 우리처럼 쿠리로 갈 예정이라 해가 뜨면 바로 떠날 계획이라 하였다.
일단 컴컴한 어둠 속에서 쉴 곳이 필요했다. 버스터미널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ATM기를 발견했다. 문이 열려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을 잘 막아주었고 나름 아늑했다.
잘 안 되는 영어로 외국인 커플과 대화를 했는데, "너무 추워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창문을 열어놨는지 모르겠다." 화를 내니 그들이 말했다. "우리 쪽 창문이 부서져서 없었어..."
아 이들은 진짜 얼마나 추웠을까...
ATM기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누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이 들어와서는 다들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사정을 해도 전혀 먹히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인도 사람들 20명 정도와 함께 누군가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 앉아 날밤을 지새웠다. 동이 틀 무렵 짜이를 한잔 사 마시고 아침식사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서양 커플은 참으로 특이했다. 무조건 아침식사로 샌드위치를 고집했다. 문이 열려있는 현지 식당을 하나둘씩 지나쳐갔고 어디인지 모르는 지점까지 돌아다니면서 2시간을 소비했다. 겨우겨우 그들의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을 들어가서 주문을 했는데, 감자 파란타를 시켰다. 그 흔한 감자 파란타를 먹으러 2시간이나 돌아다니다니... 패 버리고 싶었다.
아침식사만 하고 그들과는 헤어졌다. 우리도 오후에 쿠리로 갈 예정이었기에 그들이 어디에서 쿠리행 버스를 타는지만 확인하고 조드푸르에서 만난 일행과 다시 만나기로 한 타이타닉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타이타닉 게스트하우스의 손님은 100% 한국인이었는데 모든 직원들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다. 이곳에서 혼자 여행 온 은유 누나와 조드푸르에서 만났던 영호를 다시 만났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쿠리로 가기로 약속했다. 영호가 기차에서 만나서 함께 낙타 사파리를 하기로 했다는 여자 3명, 나와 만나기로 한 일행 4명까지 하면 총 11명의 대규모 사막 투어팀이 만들어졌다.
조드푸르에서 만난 4명의 일행은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쿠리로 저녁 늦게 들어오기로 하여 우리가 먼저 쿠리로 가서 숙소와 사파리 예약을 해두기로 하였다. 1시 반쯤 버스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영호와 함께 사파리를 하기로 했던 다솔, 설화, 수아가 도착했다.
50Km는 더 이상 나에게 힘든 길이 아니었다. 착한 인도인 할머니가 자리를 만들어주어 꿈뻑꿈뻑 한숨 자고 나니 쿠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2명이 호객을 했는데, 한 명은 Arjun Family 게스트하우스, 한 명은 Sheetal 게스트하우스였다.
내가 먼저 그들에게 우리 일행이 총 11명이라고 이야기했다. 주도권을 갖고 와 가격을 대폭 깎을 셈이었다. 당연히 내 예상대로 둘은 난리가 났다.
대한민국이 괜히 동방예의지국이겠는가. 딱 봐도 Arjun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가 제시하는 가격을 먼저 들었고, Sheetal 쪽 가격도 들어봤으나 둘이 말을 맞춘 듯 가격이 똑같았다. 그러나 끝까지 같을 리가 없었다. 11명의 손님 앞에 장사가 없었다. 가격은 뚝뚝 떨어졌고, Arjun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으면서 낙타 사파리를 하기로 결정했다.
오늘 하루는 할 게 없었기에 마을을 돌아다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식이 막 끝났는지 손님들과 신랑 신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현지인들에게 나도 들어가서 좀 보고 싶다고 했지만 허락해주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조드푸르에서 만났던 일심 누나 일행이 도착해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어보니 느낌이 닿는 대로 왔는데 우리가 있었다고 했다. 그녀들은 2명의 일행을 더 데리고 와 총 13명의 대규모 낙타 사파리 인원이 모집되었다. Arjun 게스트하우스 사장인 Arjun의 입이 귀에 걸렸다.
저녁 식사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모닥불을 켜서 캠프파이어를 했다. 서로서로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다시 만난 사람들도 있었기에 옹기종기 앉아 그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늦은 밤, 11시 무렵 내일의 일정을 위하여 타오르는 모닥불을 남겨둔 채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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