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팍세 - 2013. 12. 26
어제 버스 터미널을 찾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버스 터미널부터 검색했다. 부스스하게 눈을 반쯤 뜬 형에게 다른 버스 정류장을 찾았으니 한번 가보자 이야기했으나, 형은 마음 편하게 여행사에서 사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쓸데없는 똥고집이 나왔다. "형, 여기만 딱! 가봐요. 버스 터미널 못 찾으면 바로 여행사에서 살게요" 형은 체념한 표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숙소 바로 옆 여행사를 지날 때 형의 발걸음이 한층 더 무거워 보였다.
차가 매연을 내뿜고, 태양이 내리쬔 도로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거리를 걸으니 땀이 줄줄 흘렀다. 슬리퍼를 신은 발은 더러워지기 시작했고 콧속도 텁텁해졌다. 괜히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표시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몇 달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허탈했다. 어디로 옮겼는지 물어보니까 걸어갈 수는 없는 거리라고 하였다. 형한테 너무 미안했다.
늘어진 오징어처럼 몸이 축 쳐진 채로 다시 팍세 시내로 돌아왔다. 아무런 말없이 눈에 보이는 여행사에 들러 내일 아침 7시에 방콕으로 출발하는 버스표를 구매했다. 그제야 조금 형의 얼굴이 환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골목 한쪽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Come on, Come on~"
그들과 우리를 제외하고 이 골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마음에 걸어가 보니 라오스 아저씨 4명과 외국인 4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함께 맥주를 마시잔다.
말 그대로 길거리 헌팅이었다. 나야 남는 게 시간이니 의자를 하나 가져와서 자리를 잡았지만, 형은 별로 내키지 않는지 숙소로 먼저 돌아간다고 했다.
가만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이탈리아 남자가 팍세에서 2년 정도 살다가 레스토랑을 개업했는데 친하게 지내던 라오스 뚝뚝 아저씨들이 축하 겸 술을 사고 있는 것이었다. 길 한쪽에는 뚝뚝 4대가 줄지어 서있었다.
이탈리아 남자와 라오스 아저씨들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3명의 외국인은 무슨 관계인지 물어보니, 한 명은 이탈리아 요리사의 친구였고, 2명은 나처럼 길거리에서 헌팅당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가히 헌팅의 제왕, 세렝게티의 맹수와 같았다.
술이나 먹고 놀자는 마음에 내가 마실 맥주를 사러 슈퍼마켓으로 갔는데 라오스 뚝뚝 아저씨들이 번개처럼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맥주병을 가져가더니 자기가 계산을 했다.
'이거 뭐지...? 내가 헛 것을 보고 있나? 내 평생 돈 100원이라도 더 받으려는 뚝뚝 아저씨들만 봐왔는데... 자기 돈으로 나에게 신성한 맥주를 사주다니...'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니 오늘의 주인공인 이탈리아 요리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오늘은 툭툭 아저씨들이 나에게 맥주를 사기로 한 날이야, 너는 그냥 재밌게 놀고, 즐겁게 마시다가 가면 돼".
이렇게 고마울 수가... 뚝뚝 아저씨는 맥주 한 병을 내 손에 쥐어주었고, 한 박스의 맥주를 더 샀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길 건너편으로 뛰어가 볶음땅콩을 사 왔다.
함께 맥주를 마시는 외국인 중 한 명은 미국인이었는데 중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1년간 아시아 여행을 하고 있다 하였다. 첫 여행지가 라오스였는데, 라오스의 매력에 빠져 벌써 6개월째에 머물고 있고 남은 6개월도 라오스에서 보낼 예정이라 하였다.
다른 외국인 한 명은 네덜란드인이었는데 그 역시 비슷했다. 3개월간의 아시아 여행 중 라오스가 너무 좋아 그냥 라오스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했다.
뚝뚝 아저씨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계속 영업을 했다. 중간중간 손님이 오면 술을 마시다 말고 운전대를 잡았다. 당연히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술에 취한 사람이야 그럴 수 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자기 눈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운전대를 잡는 사람의 툭툭을 타는 라오스 사람들이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중간중간 몇 번의 운전을 더 하더니 의자에 툭하고 걸쳐 앉으면서 말했다.
"오늘 툭툭 장사는 여기서 끝!"
한참은 전에 끝내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외국인들끼리 작은 말싸움이 일어났다. 주제는 어느 나라가 더 '자유'로운 가였다. 물론 여기서 자유는 '언론의 자유', '개인의 자유' 따위가 아닌, '마약'과 '섹스'였다. 대한민국은 할 이야기가 없으니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나라는 역시나 미국과 네덜란드였다. 미국인이 "우리는 북서부 어디에 가면 편의점에서 대마를 팔고, 섹스는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장황하게 이야기했으나, 네덜란드인의 이야기는 짧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나 암스테르담 출신이야" 네덜란드인의 판정승이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슬슬 몸이 힘들어졌다. 뚝뚝 아저씨들도 어디로 인가 사라졌고, 자리의 주인공인 이탈리아 요리사 아저씨는 잠시 후에 온다며 라오스 여자 친구를 데리고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미국인과 네덜란드인은 또 무슨 쓸데없는 주제로 싸우고 있었다.
일어나야 할 때였다. 그만 간다고 인사를 하니 내일 또 이 곳에서 술을 한잔 할 거라면서 나오라고 했다. 내일 아침 7시에 태국으로 떠나는 버스표를 이미 사뒀으나, 내일 보자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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